‘아, 여행가고 싶다. 해외여행으로.’
최근 친구들과 한탄처럼 자주 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막상 준비를 하려고 하면 망설여진다. 여행이 주는 의미가 지금 나에게 정말 필요한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마음인지, 떠나고 싶다는 말이 종종 튀어나오는걸 보면 여행을 갈 때 인거같기도 하고. 최근 유튜브를 키면 내 유튜브 알고리즘이 알쓸인잡을 추천해준다. 유튜브에 올라오는 알쓸시리즈는 참을 수 없다. 나는 원래 문학과 책에 관심이 많은 편이 아니여서 김영하작가님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하지만 알쓸시리즈를 볼 수록 작가님의 책을 꼭 읽어봐야지 다짐했었고, 오늘 마침 눈에 띄어 골라 읽게 되었다.
18p - 그렇다면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길가메시 서시시의 주인공 길가메시는 죽지 않는 비결을 찾아 헤맨다. …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결말이다. 결말에 이르러 주인공은 원래 찾으려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을 얻는다. 대체로 그것은 깨달음이다. … 이 과정에서 처음 길을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고향에 도착한다. … 관객은 그녀가 추구하는 표면적 목표(시나리오 공모 당선)의 밑바탕에 진짜 목표(가족에게 받아들여지고 사회로 나아가는 것)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이처럼 ‘추구의 플롯’으로 구축된 이야기들에는 대부분 두 가지 층위의 목표가 있다. 주인공이 드러내놓고 추구하는 것(외면적 목표)과 주인공 자신도 잘 모르는 채 추구하는 것(내면적 목표), 이렇게 나눌 수 있다.
〰️ 나는 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이 아니다. 그래도 여행이 인생에 있어서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준비를 하기 전에 유럽으로 혼자 다녀온 여행은 나에게 정말 의미있다. 인생에서 ‘혼자’가 되는 ‘최초의 순간’이였다. 친구도, 가족도, 동료도 없는 혼자여서 가볍고, 파란만장했다. 스위스의 절경을 바라보면서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생각날 때는 내 인생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의미와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여행이 나에게 의미가 깊었던 이유는, 내가 나에 대해 알게된 순간들의 연속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음식이 주는 즐거움을 알지만, 삶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로써는 추구하지 않는다. 그림 보는것을 즐긴다. 박물관도 좋아한다. 산과 풀과 같은 자연에서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느낀다. 뮤지컬이나 버스킹을 보면서 스피커가 아닌(물론 모두 스피커를 통해 증폭된 소리이긴 하지만) 공연이 주는 에너지를 깨달았다. 유명한 관광지를 돌아다니며 건축물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도 느끼게 되어, 한국에 돌아와서 건축물을 볼 때 특징을 나름 뜯어보게 되었다. 시장터를 방불케 하는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한없이 섬세한 미술품과 조각품, 건축물을 보면서 압도당한다는 느낌도 느껴봤다. 종교가 없지만, 성스럽다는 표현이 불쑥 입밖으로 튀어나오기도 했다. 나는 종교를 믿는 인간의 그 강한 믿음과 신념, 의지를 성스럽다고 느끼는 듯 하다. 벌써 여행을 다녀온지 4년이 다되어가는데, 그 여행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이렇게 술술 나열되는걸 보면, 정말 다녀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히 이 혼자만의 유럽여행은 나의 남은 인생을 더 다채롭게 만들어준게 틀림없다. 나에게 이 유럽여행을 ‘추구의 플롯’으로 본다면 목표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 돌이켜보면 외면적 목표는 ‘남들 다 다녀오는 유럽, 나도 한번 갔다와보자. 취업하기 전에 장기여행이라는걸 다녀와보자.’ 정도로 큰 의미는 없었던거 같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에는 나에게 훨씬 더 큰 돈을 들여서 다녀오는거고, 취업도 보장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망설였긴 했었다. 그래도 ‘앞으로 살면서 남들 다 해본 경험 나만 안해본걸까봐, 다녀오지 않을걸 후회할까봐’ 이게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그리고 뭐 어떤 내면적목표를 세워야할지도 몰랐었다. 그래서 망설이기도 했던듯 하다. 하지만 이건 다녀오지 않으면 모른다는걸 이제는 안다. 다행히 이 여행에서 나의 내면적 목표는 ‘나를 알기’였고, 그 목표는 그 당시 썼던 돈의 가치보다 큰 것 같다.
63p - 이렇듯 인간이 자기도 모르게 입력된 어떤 프로그램에 따라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자유의지라는 것이 때로 허망하게 느껴진다. 인생은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어떤 허깨비와 싸우는 것일지도. 그게 뭔지도 모르는 채로.
〰️ 작년부터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마음 한구석에 크게 자리잡았다. 그 고민은 직장에서부터 비롯되어 돈, 내가 원하는 일, 꿈, 가치관의 순서로 점점 커지더니 가족, 친구관계, 내 인생과 같이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고 결국 처음에 시작한 고민이 무엇이였는지도 잊을만큼 광활한 고민으로 커졌다. 그럴 때면, 당연히 인생에는 답이 없으며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 길이 되는것이라는 이제는 흔한 동기부여 문장이나 영상을 봤다. 그런걸 접하면 ‘그래, 하고싶은걸 하는거야! 한번사는 인생, 답이 없으니 그저 내가 선택하는거야!’라고 부푼다. 지금 나는 애인도 없고, 딸린 자식도 없고, 부모님도 아직 건강하시며,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는 직장도 있고 돈도 나름 모아둔게 있으니, 남부러울거 없고 한없이 자유로운 상태라는것을 자각하며 더더 부풀어 오른다. 하지만 금새 모든 의욕이 한순간에 바람빠지는 풍선처럼 사그라드는데, 그 이유가 여기 나온 이 문장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의지라는게 허망하게 느껴진다는것, 내면의 허깨비로 잔뜩 부풀었었다는 것. 그 허깨비가 뭔지도 모른다는 것.
81p - 생각과 경험의 관계는 산책을 하는 개와 주인의 관계와 비슷하다. 생각을 따라 경험하기도 하고, 경험이 생각을 끌어내기도 한다. 현재의 경험이 미래의 생각으로 정리되고, 그 생각의 결과로 다시 움직이게 된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에 하지 말았어야 할 말부터 떠오르고, 밤이 되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뒤척이게 한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를 말아야 하고, 불안한 미래는 피하는 게 상책이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미적거리게 된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 답도 없는 고민을 하며 풍선처럼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다보니, 이 문장들이 마음에 제일 와닿는다. 부풀었다 꺼지고나면 ‘그래, 일단 회사생활에 열심히 해보자. 내 커리어에 있어서 지금 직장이 더없이 좋진 않지만 나쁘지 않은건 맞으니까.’ 라고 현실에 집중하려고 하고, 꺼졌다가 부풀어오르면 ‘그래, 어차피 직장은 평생 나를 책임져주지 않고 무언가 하고 싶은게 있다면 생각날때 해봐야지. 퇴근 후나 주말에도 시간이 있으니 이것저것 해볼 수 있을 때 해보는거야.’ 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계속 어떤 선을 기준으로 왔다갔다하는데, 중도가 매우 중요한거같지만서도 도저히 그 선을 타고 안정적으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극단으로 가지도 않는다. 원씽에서 읽고 느꼈던것 처럼 한번쯤 극단으로 갈 때인거 같은데, 그 극단이 일이 아니라 현재로 나를 돌려놓을 수 있는 다른 수단 쪽으로 움직이는 것도 방법인듯 하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건 부풀고 꺼지는걸 멈추고 현재를 열심히 사는거니까. 그리고 그러기 위한 수단 중 하나가 여행일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다녀와서 현재를 살아가는데 힘을 얻는다면, 그게 꺼진 마음이든 부풀어진 마음이든, 한쪽 상태를 지금보다는 좀 더 오래 유지할 수 있을거 같다.
110p -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거듭하여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155p -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자주, 명백하게 분류되고 기호화된다. 국적, 성별, 피부색, 나이에 따른 스테레오타입이 정체성을 대체한다. 즉, 특별한 존재(somebody)가 되는게 아니라 그저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nobody일 뿐이다.
〰️ 혼자만의 유럽여행이 좋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인 것 같다. 한국에서는 내가 항상 somebody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이게 책에서 말하는 좋은의미의 특별한 존재라기 보다는, 한국에서는 누군가와 대화를 할때 나의 신분자체, 그리고 이 곳에서 내가 생각하는 내가 이미 규정되어 있는 somebody라는 거다. 여기서의 신분은 나이, 직업, 성별, 학력 정도 될거 같다. 한국에서는 이정도 정보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지 대충 지레짐작할 수 있으니까. 나의 유럽여행은 평생을 somebody로만 살아오다가 nobody가 되었던게 자유롭게 느껴졌던거 같다. 한국에서 나는 스스로 하늘하늘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으면 안어울리고,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인간이니 전시회를 가서 한가롭게 그림을 보는건 사치라고 생각하고, 교회나 성당은 나는 갈 일이 없는 건물 정도로 생각했다. 나 스스로를 somebody로 규정하는 환경이 한국이였고, 그게 스스로를 규정하는것인지도 깨닳지 못했었다. 하지만 약 3주간의 유럽여행동안, 잠시나마 nobody였고, 그 nobody의 경험은 나를 더 나은 somebody로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157p - 어떤 도시에서 여행자들은 현지인처럼 보이고 싶어하기도 한다. 여행자의 표지들, 예컨대 커다란 배낭, 편안한 신발, 손에 든 지도, 카메라 등을 숨긴다. 마치 모처럼 휴일을 맞아 산책을 나온 현지인처럼 보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장’은 여행자들이 선망하는 나라와 도시에서만 수행된다. 뉴욕이나 파리, 바르셀로나와 같은 선진국의 매력적인 도시에서는 ‘습격을 감행하는 여행자’가 되어 스테레오타입으로 분류되기보다는 노바디가 되어 가급적 눈에 띄지 않으려 한다.
〰️ 내가 155p를 잘못이해했나..? 스테레오타입으로 분류되는게 노바디라고 생각했었는데.. 다음에 다시 읽을땐 바로 파악이 되었으면 좋겠다.
179p - 실뱅 테송의 말처럼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하러 그 먼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 내가 155p에서 이해한 바가 맞다는걸 157p 이후로 계속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장들에서 확신을 얻었다. 내가 유럽여행에서 스스로 규정하는 나를 잠시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다녀와서 다시 내가 나를 잊었던 순간을 기억하면서, 나를 다시 규정한다. 원래 나를 규정하던 것들에서 수정하고, 추가하고, 삭제하고.
184p - 그는 섬바디로 여행을 시작했지만 허영과 자만으로 화를 자초한 이후부터는 노바디로 스스로를 낮추었고 그 덕분에 고난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 나는 섬바디의 내가 대단하지 않아서 노바디가 오히려 더 좋았던거 같다. 나중에 나도 섬바디가 노바디보다 대단해지는 때가 오면 좋겠다. 그 때 꼭 노바디의 나를 잘 받아들이고 허영과 자만을 가지지 않도록 경계해야겠다.
202p - 지금도 나는 비행기가 힘차게 활주로를 박차고 인천공항을 이륙하는 순간마다 삶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는 기분이 든다. 휴대전화 전원은 꺼졌다. 한동안은 누군가가 불쑥 전화를 걸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승객은 안전벨트를 맨 채 자기 자리에 착석해 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어지러운 일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멀어지는 순간이다. 여행에 대한 강렬한 기대와 흥분이 마음속에서 일렁이기 시작하는 것도 그때쯤이다. 내 삶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순간이다.
〰️ 나는 비행기, 기차, 버스 등 이동시간을 좋아한다. 친구들은 이동시간을 좋아하는 내가 이해가 안된다고 했다. 내가 이동시간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시간동안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이동’이라는 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동시간에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 그 시간을 두배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거 같아 기분이 좋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평소에 핸드폰 들고 시간죽이기를 누구보다 잘하면서 그만큼 죄책감도 큰 것 같다.
203p - 우리는 뭔가를 하거나, 괴로운 일을 묵묵히 견뎌야 한다. 여행자는 그렇지 않다. 떠나면 그만인다. 잠깐 괴로울 뿐,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렇다.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한동안 여행을 가고싶기는 하지만 귀찮기도하고 들어갈 돈이나 시간이 먼저 걱정되어 의욕이 없어지는 기간이였다. 근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다시 여행을 소망하게 된거 같다.
정말, 이 책 읽고 나서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다. 어디를 갈지 정하는데, 정말 입으로 세계여행을 했다. 결국 몽골과 괌으로 좁혔다. 친구들의 일정을 고려해서 둘 중 하나를 갈거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는 직장인이니까. 그래도 간만의 여행준비라서 그런지, 여행지를 정하는 과정조차 즐겁고 설렌다. 이미 여행이 시작된 기분이다.
삶이 팍팍하고, 여행이 그리울 때, 여행을 가고싶었던 그 때의 내가 그리울 때, 그럴 때 또 한번 이 책을 읽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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